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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학(地理學, 영어: geography)은 지표상에서 일어나는 자연 및 인문 현상을 지역적 관점에서 연구하는 과학의 한 분야이다.
지리학의 관심 대상은 들쑥날쑥한 분포이다. 지구에서 발견되는 사물에는 다중성이 존재한다. 사물의 다중성은 공간적으로 무질서하게 분포한다. 무질서한 분포가 사물이 지리적인 성격을 나타내게 한다. 다른 관심 대상은 상호관련성이다. 예를 들어, 농업 현상의 경우 농업과 연관된 기후, 토양, 인구, 경제적 조건, 기술력과 다른 조건 사이의 연관성을 이해하지 않으면 해당 농업의 지리적인 특성을 파악할 수 없다. 이를 바탕으로 미루어 볼 때, 지리학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왜, 그곳에, 무엇이 있으며, 그래서 그곳에서 나타나는 상태가 어떻게 되느냐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공간이나 자연환경이라고 하는 물리적 존재를 대상 안에 포함하는 점에서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양면의 성격이 있는 공간 및 자연과 경제, 사회와의 관계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 분야이다. 원래는 농경이나 전쟁, 통치를 위해 각지의 정보를 조사해 정리하기 위한 연구 영역으로서 성사했다. 그러나 현재는 자연과학 내지 사회과학의 한 분야로서 지역마다 다른 공간적 특질성을 설명하는 데 필요하게 되었다.
영어에서 지리를 뜻하는 단어(geography)는 고대 그리스어의 고대 그리스어: γεωγραφία에서 유래하였다. 에라토스테네스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땅을 뜻하는 "η γ η" (hê gê)와 기술(記述)을 뜻하는 "γραφειν" (graphein)를 합친 용어다. 지리(地理)라는 용어는 주역에서는 산천의 환경과 형세를 나타내는 말이었고, 구당서, 원사에서는 오늘날의 지리학과 유사한 본보기로 쓰였다.
서양의 지리학으로는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세계지도를 만들었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세계지도는 기원전 9세기 고대 바빌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낙시만드로스 (기원전 610년 경 -기원전 545년 경)의 아이디어는 후대 학자들의 인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후대 그리스 작가들이 지리학의 진정한 창시자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최초로 예술과 과학의 방식으로 지리학을 바라보았던 그리스인들은 지도학, 철학, 문학, 수학을 통해서 지리학을 탐구했다. 아낙사고라스는 식을 설명하면서 지구의 윤곽이 둥글다는 것을 보였다. 파르메니데스나 피타고라스는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그는 지구는 편평한 원반이라고 믿었다. 고대에 지구의 반지름을 구한 사람에는 에라토스테네스가 꼽힌다.
히파르코스는 최초로 엄밀하게 위선과 경선 체계를 도입한 사람이었다.
중세시대에는 로마 제국의 붕괴에 의해 유럽보다는 이슬람 세계에서 지리학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무함마드 알 이드리시와 같은 무슬림 지리학자는 상세한 세계지도(예: Tabula Rogeriana)를 만들었다.
16~17세기 동안 지속된 유럽의 대항해시대에는 많은 신세계가 발견되었다. 이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마르코 폴로, 제임스 쿡의 발견에 따라 유럽에서는 정확한 지리적 사실을 아는 것과 지리학적 이론의 기반이 필요해졌다. 그들과 같은 탐험가의 발견이 이어졌다. 경도를 찾는 문제가 대표적인 것이었다. 존 해리슨은 크로노미터를 고안하여 경도 문제를 해결했다.
18세기와 19세기는 지리학이 분리된 학문의 분과로서 인식되었던 시대였고, 유럽의 대표적인 대학의 교과과정(특히 파리와 베를린)의 부분이 된 시대였다. 많은 지리 학회의 발전은 19세기에 시작되었다. 1821년의 프랑스 지리학회, 1830년의 왕립지리학회, 1851년의 미국 지리학회, 1888년의 내셔널지오그래픽 학회가 이 당시에 설립되었다. 임마누엘 칸트, 알렉산더 폰 훔볼트, 칼 리터, 폴 비달 드 라 블라슈는 지리학이 철학에서 학문상의 과목으로 보여지게 하였다.
이슬람 지리학으로는 메카로의 순례 여행이라는 점으로 이전에 알려진 지리적 기록물을 참고로 순례지로 여행하며 새로운 지리적 지식을 계속적으로 추가할 수 있었으며, 동-서양간, 인도, 중국으로의 교역으로 인한 무역로 개척, 교역을 통한 아시아의 지리적 지식이 첨가될 수 있었으며, 확장된 이슬람 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자료로 지리적 지식이 요구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로 인해 이슬람을 신봉하는 아라비아인들은 이슬람 제국이 영토를 확장한 9~14C 동안 지리적 발달을 이룰 수 있었다.
동양의 지리학으로는 중국의 지리학과 한국의 지리학으로 볼 수 있다.
먼저 한국의 지리학은 실학이 발달하면서, 민족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한국의 전통지리도 이에 따라 발달했다. 한백겸의 동국지리지, 정약용의 아방강역고와 같은 역사 지리서, 이중환의 택리지와 같은 인문 지리서가 편술되었다. 중국에서 서양식 지도가 전해짐에 따라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같은 정밀한 지도가 만들어졌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근대지리학이 적용되었다.
한국에서 삼국시대나 그 이전의 지리학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반구대 암각화, 고구려 고분 벽화를 토대로 당시의 지리관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신라 말기에 선종 승려들이 중국에서 풍수지리설을 가져왔다.
고려시대에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지리지처럼 지리에 대한 문헌이 남아있다. 이 시대는 풍수지리설이 유행한 시기였다. 서경 천도와 북진 정책의 추진 근거로 풍수지리가 동원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많은 지리지와 지도가 편술되었다. 이는 중앙 집권과 국방의 강화를 위한 것이었다. 태종 때에 만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동양의 세계 지도중 가장 오래 된 것이다. 16세기에도 많은 지도가 만들어졌는데, 조선방역지도가 생존하고 있다. 세종, 성종 때에는 지리지가 편술되었다. 여기에는 군현의 연혁, 지세, 인물, 풍속, 산물, 교통 등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이 당시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을 중종 때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보충하여 편술했다.